어디로 갈까나? 고향에서
막상 길을 나서기는 했지만 갈 곳이 없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져 있지만 우리 가족이 갈 곳은 정해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집은 무한한 자유를 주었고 그만큼 선택해야 할 길이 많아졌다. 여행길은 시작부터가 선택이고 공부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는 고향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래 고향으로 가자!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집이 움직인다. 여행길을 축복하는 눈이 내린다. 입춘이 지난 2월 23일에 내리는 눈치고는 많이도 내린다. 아이들은 내리는 눈을 보며 즐거워하고 아내는 걱정스레 창밖을 내다본다. 고향에 도착할 즈음에는 다행히도 눈이 그쳤다. 고향이라고 찾아왔지만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동네를 품어주던 산자락이 잘려나가고 계곡을 막아 만든 커다란 저수지는 동네 앞에 흐르던 맑은 물을 마르게 했다. 별로 보여줄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룻밤은 덕유산에서 자야지 하는 생각에 집을 끌고 저수지 위쪽 산길로 접어들어 조용한 산속에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저녁준비를 하고 나는 땔감을 구하러 간다 하니 아이들이 따라나선다.(움직이는 집의 난방은 전기장판과 화목난로를 이용한다.) 겨울산에는 서서 죽은 나무며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잠깐 주워 모은 나뭇가지가 한 이틀은 쓸 수 있겠다. 고정된 집에 있었다면 난방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을 텐데 여행을 나와서는 아이들과 놀면서 땔감을 구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돈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을 온 가족이 몸을 움직여 해결해야한다. 저녁밥상이 차려지고 난로에 불을 지피니 집안이 훈훈하다. 아이들은 밥도 잘 먹고 잠깐 신나게 노는가 싶더니 아빠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든다. 아이들의 적응력은 참 대단하다.
낯선 환경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아내에게 말을 건넨다.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면 좋겠어요?" "음, 건강하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하는 착한 사람 정도면 되지." 아주 단순한 대답이지만 진리가 담겨 있다.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똑같은 다짐을 했죠. '이 아이는 우리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 것이 아니다. 어느 별에서 왔을지 모를 이 아이는 아름다운 우주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고 도와주자. 어른들이 생각하는 삶을 강요하지 않겠다.' 뭐 대충 이런 다짐들요." 내 바람이 그러하듯 아이들에게도 여행을 통해 자유를 선물하고 싶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삶을 배우고 아름다운 자연에서 평화와 안식을 배우는 아이들이길 바란다. 여행자로 세계를 떠돌며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양한 가능성의 길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밤이 깊어간다.
밤새 눈이 또 내렸다. 잘 자고 일어난 세 살난 민정이가 묻는다. "아빠! 여기 누구집이예요?" 하룻만에 바뀐 집이 낯설었나보다. 아침밥을 먹고 시냇가로 나간다. 눈이 내리기는 했지만 봄은 봄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냇가 얼음이 녹아 흐르고 겨울잠을 자던 나무들도 깨어나 뿌리에서 가지끝으로 물을 빨아올리고 있다. 아이들과 냇가에 쪼그리고 앉아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쉿! 수남아, 민정아, 무슨 소리가 들려?" "음! 얼음 깨지는 소리!", "물소리", "새소리", "그래, 우리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거야!"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돌세우기 놀이를 한다. 아빠는 진실한 마음을 담아 길쭉한 돌을 바위에 세우면서 균형잡기 놀이를 한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돌은 바로 서지 않는다. 민정이는 한 손으로 쉽게 하는 일을 아빠는 어렵게 한다. 민정이는 벌써 마음의 균형을 알고 있는 걸까? 아이들에게 아빠는 친구가 되고, 바람은 선생님이 되어 자연에서 놀고 있다. 아빠는 가난해서 너희들에게 화려한 옷도 비싼 장난감도 못 사주고 학원에도 보내지 못하겠지. 하지만 아빠는 늘 너희들과 놀아주고 사랑해 주겠어!
봄바람이 분다. 남쪽에는 벌써 봄이 와 있겠지? 수남, 민정, 정수야! 봄에게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