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백두산에 오르다.

김길수 2024. 5. 1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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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을 설치며 수많은 꿈속을 걸어 다녔다. 소중한 인연들, 서로 상처 주고 아파했던 인연들, 부족하고 아쉬웠던 순간들, 아직 만나지 못한 인연들과 함께 걸었다. 모든 인연들이 한결같이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걸어간다. 꿈속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도, 용서하려는 마음도, 누군가에 대한 미움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따뜻한 체온이 모든 인연들을 감싸고 평화로운 길을 걸었다. 완전한 평화다. 잠을 설쳐가며 밤새 너무 많은 길을 걸어 몸은 피곤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마음의 새벽은 환하게 빛난다.

백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한국인 관광객 부부를 만나 버스요금으로 택시를 타고 백두산 산문에 도착했다. 입장료 125원, 보험료 5원, 백두산 여기저기를 도는 버스비 85원, 사파리차 80원, 일인당 300원을 들여 백두산을 오른다. 내나라, 내 땅에 있는 산에 가는데 드는 비용치고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비룡폭포로 오르는 길에는 2미터가 넘는 눈이 쌓여 있다. 5월에 내린 눈으로는 50년 만에 최고란다. 중국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눈도 빨리 치우고 관광객을 받는다. 이렇게 벌어들이는 관광 수익이 엄청날 텐데, 북한과 남한이 사이가 좋아져서 북한이 관광수익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백두산 천지에서 나와 비룡폭포를 타고 내려온 물을 담는다. 백두산 관광기념으로 천지물을 가져가겠다는 관광객들에게도 물을 담아 건넨다.

"녹연담" 꿈에 그리던 연못이 여기에 있었구나! 작은 폭포가 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이다. 이 근처 숲속 어딘가에 오두막이나 하나 짓고 세월을 보내도 좋겠다.

드디어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가난한 여행자 가족은 봄바람을 등에 메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골목길을 걷고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천지까지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폭설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는데 오늘은 거짓말처럼 맑다. 고맙고도 행복한 날이다.

내 나이 스무살 무렵, 인연으로 맺은 스승이 있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 먼 곳에 계시지만 박배엽 시인은 삶의 의미를 일러주는 영원한 스승이다.

국경표지석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경계를 넘으려고 하니 관리인이 막는다. 국경을 넘어 북한땅에서 배엽이형 제사를 지내려 했던 계획이 무너지나 싶어 어정쩡하게 서 있으니 관리인이 어눌한 조선말로 스님이냐고 묻는다.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러면 뭐든지 해도 좋다길래 이도백하에서 준비해 온 삶은 달걀과 차, 배엽이형이 유품으로 남긴 물통에 천지에서 내린 물을 담아 소박한 상을 차리고 절을 올렸다. 형이 쓴 시를 읽고, 형이 생전에 자주 부르던 금강선녀를 노래한다. 울컥 쏟아지는 눈물이 천지로 떨어진다. 

남의 나라 중국 땅을 거쳐 올라온 백두산, 형에게는 많이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구나!

"배엽이형,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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